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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리뷰 : 니체의 허무주의
    리뷰 2021. 5. 13. 02:02

     

     

     

     

     

     

     

    1. "벽 안"과 "벽 밖"의 의미 분석

     

    진격의 거인 세계관 속 "벽 안"은 어떤 의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벽 안"이란 유대, 기독교적 세계를 의미한다. 즉, "벽 안의 세계"는 기독교적 질서를 믿는 세계, 종교적 질서 속의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벽 안'의 세계, 즉 에르디아 왕국은 유미르 프리츠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졌는데 유미르는 시조의 거인과 접촉한 인물이다. 작품 내에서 시조의 거인은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데 신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시조의 거인을 신으로 해석하고 유미르를 그와 접촉한자로 이해해보자. 또 한편으로는 유미르는 '대지의 악마'와도 접촉한다.  이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와 비슷하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이브는 신과 접촉하면서 동시에 뱀과도 접촉한다. 유미르가 시조의 거인(신)과 접촉하는 동시에 대지의 악마와도 접촉한 것처럼 말이다. 즉, 대지의 악마는 성경에서 '뱀'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대지의 악마가 커다란 나무 옆 우물에서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이브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열매를 먹게 되는데 이는 뱀의 유혹 때문이다. 이 뱀은 하나님 몰래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대지의 악마가 나무 옆에 숨어있었다는 것은 이브와 접촉한 뱀이 하느님 몰래 숨어있었다는 것과 비슷한데, 이는 절대 우연이 아니다. 또 유미르는 돼지를 풀어주는 죄를 범했는데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은 이브와 이점에서도 유사하다.

     

    (2) 에르디아 민족에 대해 살펴보자. 에르디아인들은 시조의 거인(신)의 일부로 만들어진 민족이다. 이를 성경과 비교해보자. 성경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는 에르디아인들이 시조의 거인의 일부로 만들어진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에르디아인들은 신의 민족, 즉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다. 또 에르디아인들이 유대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이는 마레 왕국 에피소드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마레 왕국은 에르디아인들을 핍박한다. 마레 왕국을 나치 독일로 해석해보자. 마레 왕국 병사들의 복장 주거형태, 제국주의적인 모습,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라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마레를 나치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마레 왕국(나치)에 핍박받는 에르디아인은 누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 나치에게 핍박을 받은 유대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 작품의 주제

     

    이제 이 작품의 주제에 관해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의 주제는 <허무주의>다. 특히 철학자 '니체'가 말한 그 허무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아마도 작가는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는 무엇인가? 허무주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2-1. 허무주의의 등장배경

     

    인간은 왜 존엄한 것일까? 왜 인간은 모두 평등한가? 우리는 모두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쉽게 답하기 힘들다. 인간은 왜 존엄한가? 태평양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덩어리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기에 플라스틱 덩어리는 하찮은 물질 정도로 취급되고 인간은 존엄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또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보자.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인생이 고통스럽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고통이 싫다면 그냥 그 고통을 주는 삶을 포기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삶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걸까? 즉, 이 모든 질문을 요약하면 "인간의 삶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은 "신"이다. 중세시대까지 인류는 종교적 질서 아래에 있었다. 인류는 삶의 의미나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신으로부터 구했다. 정확히는 기독교의 신으로부터 구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들어졌으므로,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다. 신의 형상을 본 따 만들어진 인간은 태평양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덩어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본 딴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이 도출된다.

     

    그러나 신에 의한 질서유지는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간 이성의 발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인간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은 매우 설득력 있게 기독교의 "창조론"을 반박하였고, 모든 것에 경험적 근거를 요구하는 과학적 풍토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풍토를 표현하는 작중 인물은 "앨빈 스미스 조사병단 단장"이다. 앨빈은 이성을 통해 벽 안의 세계, 즉 신의 세계에 의문을 가진 인물이다. 앨빈 단장이 어렸을 적 선생님이던 아버지에게 질문한 것을 떠올려보자.

     

    "선생님, 벾 바깥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앨빈은 이성을 통해 '벽 안'이라는 신적 질서를 의심하고 도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현실에서 과학과 이성의 발전이 사람들이 신을 의심하게 만든 것처럼, 이성적이고 지식을 열망하는 앨빈은 '벽 안'으로 대표되는 신의 세계를 의심한다.

     

    이성의 발달을 얘기하였으니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 해보자.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종교적 세계관 속 인간은 자유로운가? 당연히 아니다. 종교는 여러 관습과 규율들로 인간을 옥죄고 제한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에대한 갈망은 종교적 질서를 타파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작중에서 이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주인공 앨런이다. 아르민도 해당된다. 앨런과 아르민은 작중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한다. '벽 바깥'의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런 목표를 가지고 실제로 바다에 도달하는 인물이다. 즉, 벽을 넘어서(신적 질서를 거부하고) 벽 바깥의 자유를 찾아가는 인물이다. 

     

     

    2.2 허무주의

     

     인간은 '이성'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통해 종교적 질서에서 벗어났다. 니체는 이를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표현은 종종 오독되고는 한다. 니체는 종교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신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우리가 죽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이유는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독교를, 신을 죽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기존에 해답을 주던 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없다면 도덕을 지킬 이유도 없어진다. 왜 선하게 살아야하는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 밑에는 종교적 가치가 깔려있었고 지금은 그 가치가 없어졌다. 이로 인한 인간들의 허무적 정황, 방황, 혼돈을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하였다. 작중 이를 가장 잘 묘사하는 대사를 살펴보자. 주인공 앨런은 바다를 처음 보고 아르민과 미카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바다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고 그렇게 믿어왔어. 근데 아니었어. 바다 너머에 있는 건 적이다. 그럼 저 너머에 있는 적들을 다 죽여버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 -진격의 거인 3기 part2 10화, 앨런의 대사 중-

     

    위 대사를 분석해보자. 앨런은 바다를, 자유를 열망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다. 고통스러운 삶도 자유를 위해 견뎠다. 여기서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벽 바깥의 세계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벽 안"은 종교적 질서의 세계이므로 "벽 바깥"은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난 세계가 된다. 따라서 앨런은 신의 울타리를 벗어난 세계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바다에도 자유는 없었다. 자유를 열망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앨런은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벽 바깥에 바다가 있긴 했지만 그 너머에는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앨런은 이제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이것이 바로 앨런의 허무주의다.

     

    다시 니체로 돌아가 보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허무주의적 정황을 걱정했다. 그리고 큰 전쟁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인간의 도덕이 종교적 가치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왜 사람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신"이라고 대답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 신은 죽었다. 즉,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위의 앨런의 대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럼 저 너머에 있는 적들을 다 죽여버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

     

    니체는 단명하였는데, 니체가 죽고 14년 후 니체의 예언대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니체 시대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예상되던 시기였는데, 니체를 제외한 모든 사상가들이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는 점에서 니체의 예언은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니체의 허무주의가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는 예언과 작중 허무주의에 빠진 앨런이 전쟁을 일으키고 대학살을 하는 점을 비교해보자. 둘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작가는 니체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던 것 같다. 또한 진격의 거인이라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신의 죽음과 이로 인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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